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문단 편집) == 왕조 가계도상의 특징 ==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가 개창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여러 부분에서 가계도상 공통점이 많다고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두 왕조 모두 입양을 통한 친양부자 관계를 통해 제위를 이었고, 그 혈연관계 속에서 진행된 근친혼의 모습이 드러나거나 계획된 경우가 많다는 이유 때문이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단일 가계였던 [[플라비우스 왕조]]나 여타 동양 왕조와 달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처럼 크게 두 가문이 결합된 형태였다. 하나는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루키우스 베루스로 이어지는 '''네르바 가문(또는 트라야누스 가문)''' 라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콤모두스로 이어지는 '''안토니누스 가문''' 라인이었다. 이 왕조는 아우구스투스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입양 형태로 제위 계승을 했으면서도 일정 부분 황실 구성원들 사이에 혈연 관계가 있었다. 즉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대를 잇기 위해 활용한 '''친양자 제도와 족벌주의 문화''' 아래에서 끊임없이 '''혈연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아그리피나]], [[폼페이아 플로티나]], [[대 파우스티나]], 도미티아 루킬라, [[루킬라]] 등 황실 여인들의 입김이 강했고, 이들이 황제의 제위 계승이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를 이끄는 근위대장, 수도장관 등 주요 관직 임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많이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두 왕조 모두 이렇게 확보한 '적합한 후계자’들 중 제위에 오른 황제들, 즉 [[칼리굴라]], [[네로]], [[콤모두스]]가 [[암군]]이나 [[폭군]]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평이 좋지 못했고, 멀쩡하고 유능한 후계자들은 대개 요절하거나 친위쿠데타로 제위 계승권이 무산되면서 비극 속에 죽는 일이 벌어져 중간에 제위 계승 구도가 꼬이는 상황도 연출되었다. 그리고 두 왕조 모두 이런 특징 가운데 정통성이 확보된 황족들이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이 과정 중 황제 암살 미수건으로 잡음이 일어나면서 균열이 생기고, 종국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문이 하나의 새로운 가문이 된 뒤 공동운명체로 완전히 멸문했다는 부분도 연구자들에게 공통점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울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기사계급]] 출신의 신참자 가문이었던 플라비우스 왕조와는 달리 수도 로마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집정관급 원로원 계급에 속한 두 가문이 법적, 혈연적으로 결합된 형태의 이중 가문이었다. 물론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의 가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의 [[스페인]]이나 [[프랑스]] 남부 지방이 나오지만, '''이들은 모두 최소한 아버지 대부터 원로원 계급에 속했고, 속주 총독 등 요직을 맡아 온 제국의 최상위 지도층 출신이었다.''' 왕조의 명목상의 시조인 네르바의 가문은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진 이탈리아 세습 귀족 가문이었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본가 역시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노빌레스]] 계급이었다. 또 황실의 두 가문 중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가 역시 이탈리아의 오래된 노빌레스에 속했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갈리아 혈통의 친가(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문)를 두고 있었다고 해도 피우스의 친조부가 [[플라비우스 왕조]] 치하에서 집정관 2회, 로마 도시 장관(urban prefect)까지 지낸 인물이었고, 황제 본인은 외조부로부터 이탈리아계 귀족인 안토니누스 가문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아버지 또한 트라야누스의 조카 손녀인 아내를 통해 황실과 인척 관계에 있었으며, 집정관 3회와 도시 장관을 지낸 당대의 엘리트였다. 따라서 이 왕조는 로마와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한 귀족 가문 출신의 황실이라는 점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의 차이점도 있다. 가계상 차이를 보면, 서로 비슷해보여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실질적인 창건자인 트라야누스의 적통을 잇기 위해 인위적으로 무리해서 하나의 가문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찌되었던 간에 모두 트라야누스 친누나의 친혈육이거나 인척이었고, 이들의 결혼 정책에서 종국적으로 하나의 혈통을 만들려고 했던 정황이 보인다고 한다. 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적합한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본가이자 양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클라우디우스 씨족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인위적으로 연결해 하나의 가문으로 만들고 대를 이어 나갔다. 즉, 창건자 생전의 왕조 개창부터 지속적으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혈통을 얻었고, 궁극적으론 다른 성씨의 가문을 '''하나의 가문(카이사르 가문)'''으로 결합해 완성해 나갔다. 그래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라는 것이 일반 민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졌고, 당대부터 지금까지 두 가문은 멸문 직전까지 하나의 가문이었다. 따라서 이를 반영하듯 이 왕조의 가계는 계속되는 근친혼과 복잡한 입양 관계 등으로 거미줄처럼 상당히 복잡하다. 이런 특징은 같은 세습 왕조이자 입양 관계가 많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의 가장 큰 차이점인데, 사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역시 하드리아누스의 기본 계획[* 하드리아누스는 후계자로 입양했다가 요절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킬려고 했다.]대로 였다면 ‘아우구스투스의 왕조처럼 연이은 근친혼으로 복잡해졌고, 긍극적으로는 ‘아일리우스 가문=안토니누스 가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하드리아누스의 기본 계획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에 의해 바뀌게 되었는데, 그래도 조카 루킬라와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 간의 결혼을 봤을 때 두 가문의 혈연적 결합 시도는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하드리아누스가 짜놓은 결혼 계획을 임의적으로 변경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두 왕조가 이탈리아와 로마에 기반을 둔 세습 귀족 출신의 왕조였기에 황실이 이탈리아 귀족적 성향을 보였다고 해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고대 로마 파트리키 가문들의 족벌주의 연합체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부분에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차이가 있었다고 평가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